오경준의 블로그

Blogs정서적 관계와 사회적 참여의 연결고리, 상상력

2017.06.16 11:28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y


'민족(nation)'이란 무엇인가? 근대 국가의 국적으로 환원하기도, 단지 같은 말을 쓰거나 가까운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로 손쉽게 확장하기도 어려운 이 단어의 뜻을 두고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은 '상상의 공동체'란 개념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그가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는 날조된 믿음이나 거짓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그는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물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마을보다 큰 공동체는 어떤 것이나 상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오직 상상만이 우리가 아직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연결은 상상이다


인류 역사에서 '상상의 공동체'가 출현하게 된 정확한 형식적 조건, 이를 야기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파악하고자 했던 앤더슨의 시도와 달리, 이 글은 그가 언급한 연결의 상상적 특징 자체를 다루고자 한다. 일찍이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인간의 지각 능력 중 상상력의 역할에 대해 상세한 이론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상상력은 크게 세 가지 구분되는 특징을 갖는 능력이다. 상상력의 첫 번째 특징은 '관념(idea)'을 요소에 따라 분리하고 혼합하여 다른 방식으로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 때 '관념'은 인간의 사유 활동의 재료로서, 외부 세계로부터 얻은 지각인 '인상(impression)'이 그 '생생함(vivacity)'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흄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의 관념은 여러 관념들로 분리될 수 있으며, 여러 관념들은 하나의 관념으로 결합할 수 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의 두 번째 특징은 인간이 대상을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상상력의 세 번째 특징은 그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상상력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특징들은 흄과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을 '공상(fancy)'과 혼용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먼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 관념 연합이라 부르는 상상력의 첫 번째 특징, 즉 관념들을 분리하고 결합하는 능력이다.


정서적 관계의 기준, 상상력


앞서 이야기한 '상상력'은 우리가 여러 '관념'들을 연결 짓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흄에 따르면 우리는 '관념'들을 다음의 세 가지 맥락에서 연결 짓는다.

1) '관념'들이 서로 얼마나 비슷한가,

2) '관념'들이 서로 얼마나 멀고 가까운가,

3) 어떤 '관념'이 다른 '관념'의 원인, 혹은 결과인가.

즉 우리는 여기서 흄이 제시하는 '관념'들을 연결 짓는 이 세 가지 맥락을 통해, 대상과 대상의 관계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기준들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기준들은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중요한 인간 본성, '도덕 감정(moral sentiments)'으로서 '공감(sympathy, 당시 "sympathy"는 연민과 구분되는 도덕 감정 능력으로서 타인의 정서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서를 느끼는 능력을 지시하는 단어로 현대적 개념인 "empathy"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에 대한 그와 그의 동료, 아담 스미스(1723-1790)의 설명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이를 재구성하면, 우리는

1) 대상의 모습이나 처한 상황이 나의 모습이나 내가 처했던 상황과 유사할수록,

2) 대상과 내가 시공간적으로 가까울수록,

3) 대상과 내가 인과적으로 영향을 크게 주고 받을수록,

더 쉽게 대상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서를 느낀다. 이렇게 형성된 '공감'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다른 일원들에게 갖는 강력한 '동류 의식(fellowship)'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공동체의 구성과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상상의 공동체


살펴본 바와 같이 상상력은 공동체의 원천임과 동시에, 정서적 관계의 원천이다. 모든 구성원들의 직접적인 물리적 만남을 전제하지 않는 모든 공동체는 상상의 산물이다. 또한 동시에 공동체의 한 구성원은 공감 능력을 기초로 다른 구성원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믿음을 형성한다. 따라서 공동체가 상상을 기반으로 구성된다는, 심지어 상상 그 자체란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상상력을 통해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공감에 기반한 인도주의적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체화하고 공동체를 강화하는 새로운 단계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서양 정치사에 등장한 독특한 근대적 용어인 '민족(nation)'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앤더슨은 이 개념을 통해 '민족'과 '민족주의(nationalism)'의 개념적 난해함을 해소하는 동시에, 역사 속에서 "축소된 상상체"들이 일으킨 전쟁과 학살 등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런데 '상상의 공동체'가 축소될 수 있다는 생각은 현대적인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영상 제작자는 온라인 게임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사용자 집단을 '상상의 공동체'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World of Warcraft and Anderson's "Imagined Communities" by rebeccasyar


'상상의 공동체'는 특히 대규모 온라인 서버를 사용하는 컴퓨터 게임이나 소셜 미디어 상의 모임과 같이, 물리적으로 만나지 않거나, 초국가적 특징을 갖는 다수의 구성원을 갖는 플랫폼에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강화되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들은 '민족'과 다른 역사, 문화적 배경을 갖기에 구성원들이 갖는 상상의 조건들 또한 다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제 현대의 새로운 공동체들을 이해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공동체들을 강화시키기 위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과 공동체 자체에 대한 공감과 동류의식을 강화, 혹은 약화시키는 새로운 공동체들 각각의 새로운 '상상의 조건들'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허구의 함정을 넘어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에른스트 갤너(1925-1995)는 자신의 저술, <thought and change>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민족주의는 민족들이 자의식에 눈뜬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없는 곳에 민족을 발명해낸다"


앤더슨은 민족주의에 대한 갤너의 비판이 '상상의 공동체'가 갖는 상상적, 창조적 특징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허구적이며 거짓된 특징을 강조한 것이라 평가한다.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 "허구의 공동체"로 읽어낸 갤너의 입장이 다소 지나치다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판은 새로운 '상상의 조건들'을 파악하려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당연한 것들을 상기시켜 준다.


뉴스타파 - 19차 촛불집회 "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 중에서


데이비드 흄이 설명한 것처럼, 상상력은 우리가 관념들 간의 관계, 대상들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능력이지만,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 대상도 만들어낼 수 있으며, 비합리적이거나 부적절한 믿음 또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상력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공감하도록 만들어주는 유용한 도구임과 동시에 누군가의 악의와 선동에 의해 손쉽게 악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비합리적이거나 부적절한 공동체를 만드는 도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이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공동체의 구성 요소들에 대해 이전 시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비해 더 많은 상상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상상의 조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공동체들은 구성원들 간의 실제 만남을 점점 줄이면서 특정한 국가나 문화권, 지리적 생태계를 초월하여 대규모로, 혹은 다층적으로 구성되며, 때로는 지나치게 폐쇄적일 수도, 혹은 지나치게 열려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양한 방식의 정보적, 물리적 연결을 극대화시키는 초연결 사회와 "초연결 공동체"를 우리가 진지하게 준비해야 할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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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by John Lennon



참고 문헌


강동수, 흄의 철학에서 상상력의 성격과 의미, 철학논총, vol. 70, 2012, 151-170

김용환, 공감과 연민의 감정의 도덕적 함의, 철학, vol. 76, 2003, 155-180

데이비드 흄, 인간 오성에 관하여: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제 1권, 동서문화사, 2009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나남, 2002

이상국, 상상의 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카렌족의 사례를 통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론 비판적 검토, 동아연구, vol. 71, 2016, 227-279


Anderson, Benedict, imagined communities, Verso, 1983

Gellner, Ernest, thought and change, Weidenfeld and Nicolson, 1964

Hume, David, the philosophical works, vol. 4, Scientia verlag Aalen, 1964

Hume, David, treatise of human nature,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Smith, Adam,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Liberty fund,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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