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애의 블로그

Blogs인간적 존재와 기계적 존재의 이분법을 넘어선 디스토피아 세계의 극복

2017.05.30 23:48

영화 <네버 렛 미고>. 인간적 존재와 기계적 존재의 이분법을 넘어선 디스토피아 세계의 극복


인간은 기계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고 강화할 수 있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한편, 언제나 그것이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염려한다. 결론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면 적대적이 된다. 지배자로서 인간이 기계를 도구로 이루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 목표는 ‘불멸’이다. 영원히 살고자 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길가메시의 꿈은 이제 과학기술을 통해 손에 잡힐 듯 해 보인다. 기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고 강화한 포스트휴먼은 죽음을 기술적인 문제로 치부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 발전의 이면에는, 인간의 피조물에 불과하던 기계가 인간을 압도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을 항상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영화의 모티브로 활용된다. 노예로 동원되는 복제 인간 리플리컨트가 인간 세상에 침입을 하고 그를 추적하게 되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나 인간이 기계의 피지배로 전락해버린 <매트릭스(The Matrix)>(1999)는 모두 기계적 존재들이 만든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들의 세계에서 기계는 모두 안타고니스트로 기능하며 기술을 이용하면서, 언젠가는 기술에 지배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다.


영화 <네버렛미고(Never Let Me Go)>(2010)는 이러한 디스토피아 장르적 특성을 충실하게 답습하며 시작한다. 너무나 평화롭고 목가적이어서 오히려 과거적으로 보이는 '헤일샴'은 인류를 위한 장기 기증이라는 목적을 갖고 생산된 클론들이 생산되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이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공상과학 영화로부터 미래의 모습이 완벽하게 통제되고 시스템화 된, 비인간적인, 파괴되어 버린 도시의 모습을 지닐 것이라고 학습되어 그 모습들이 우리와는 동떨어진 미래의 어느 한 순간의 일인 것처럼 여기고 일견 안심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과학 기술의 발전과는 동떨어져 있을 법한 '우리와 닮은' 모습을 견지한 헤일샴은 어쩐지 더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기증자로 불리는 그곳의 존재들은 완벽하게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정, 사랑, 질투와 같은 인간적 감정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는 특히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일랜드(The Island)>(2005)는 여러 측면에서 이 영화와 비교된다. 인간에게 장기를 공급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복제인간이라는 동일한 설정을 지닌 두 영화는 하지만 설정과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아일랜드>가 복제인간들의 탈출기를 다룬 것에 비해, <네버렛미고>의 내러티브는 인간적 실존을 회복하기 위한 복제 인간들의 투쟁을 그리지 않는다. <네버렛미고>에서 이들이 시도하는 것은 고작 몇 년간 죽음을 ‘유예’시키는 것뿐이다. 그들이 저항하지 않는 것은, 헤일샴이라는 사회에서 태어난 기증자들에게 그것은 일상이자 삶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복제인간 지금과 같은 문학적 지위를 부여한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본능적인 성관계 이외에 모든 감정이 용납되지 않았듯이, 영화 <아일랜드>의 사회에서도 진지한 연애나 진정한 사랑과 같은 감정은 용인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하지 못하도록 감시되고 관리 당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감정들이 용인되고 오히려 ‘갤러리’라는 존재를 통해 장려된다. 갤러리를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인간적 감정은 ‘기증자‘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증명 당하며, 기증받는 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활용된다. 그들에게는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장차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게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헤일샴의 원장은 이것이 기증 윤리를 고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윤리의 비호 아래 있는 것은 기증을 받을 사람들 뿐이다.

이것은 기술이 낳은 또 다른 계급 사회이다. 기증자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면 어딘가에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기증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기증자란 이름으로 인간과 구분되는 존재로서, 인간적 감정마저 기증받을 자들의 몫을 위해 이용되며 소외당한다. 기계적 존재들에게 마르크스(K. Marx)가 산업사회를 바라보며 지적했던 바로 그 주체로부터의 소외가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면서, 인간이 사회적 실천, 노동의 주체이며 이 사회적 실천에 의해 인간 자신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양운덕, 81) 그는 단순히 생산이 아닌 생산 관계에 주목하며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축으로 계급사회를 이해한다. 마르크스가 소외를 개념화하던 시기는 수공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이행하던 때 였는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행의 원인이 자본의 추구이며 이것이 산업화를 부추기고 생산수단을 모두 기계화 했다고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공업 시대의 장인들은 생산도구의 소유자로서 생산품에 나의 것을 새겨 넣었다. 하지만 산업 사회의 노동자들은 임금과 자신의 결정권을 교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과 생산품을 모두 자본가의 소유로 넘긴다. 이전에 생산도구를 소유했던 노동자들은 이제는 기계의 리듬에 따라 노동을 하며 주체를 상실하고 소외당한다. 마르크스의 의미에서 이러한 상품으로부터 소외는 단지 그의 노동이 상품이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의 노동이 그와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그의 노동력과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노동현장에서 자신의 노동에 대해 아무런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 삶과 노동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 이것은 단지 생산과정에서 소외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체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노동자는 그것들과 분리되는 동시에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노동수단이 기계화 되자마자 기계는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동의 내용으로부터의 내용 일체를 빼앗아버린다.


영화에서도 ‘기증자’들은 삶에 대한 결정권을 박탈당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선택할 수 없다. 오로지 한 가지의 정해진 길만을 갈 수 있다. 비용을 지불하고 그들의 장기를 기증받을 사람들을 위한 삶이다. 기증받을 사람들과의 권력 관계에서 그들은 대상화 되고, 상품화 된다. <아일랜드>에서 기계적 존재들이 철저히 복제 인간이 아닌 ‘상품(product)’으로 호명되는 것에서 이 영화는 조금 더 상황이 나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이름으로 호명되며 단지 부여된 시간이 짧은 인간(human)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기존의 복제인간을 다룬 영화들보다 기계적 존재들을 적대시하는 감정에서 오는 죄의식을 그것이 생산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전가 시킨다. 여기서 이들의 생산자로 여겨지는 헤일샴의 원장은 헤일샴을 기증 윤리를 고찰한 마지막 집단이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기증자의 예술을 통해 영혼을 확인하는 것이 단순히 기계를 인간의 도구로서 착취하는 것에서 더 진일보한 방식인 것처럼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그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다는 사실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복제 인간에게 감정이 있고 없고는 기증을 받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거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장기를 공급받기를 바랄 뿐, 그것이 인간성을 담지했는지의 여부는 논외였다. 결국 복제 인간들은 삶을 살아가는, 중년이 되기도 전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기증받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 소외당한다.

마르크스는 소외 개념을 통해 인간을 소외 당하는 존재로 만드는 모든 관계는 평등한 사회를 위해 폐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사회는 인간에게 더 이상 스스로 부과한 추상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면서 그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고 자신을 소유하는 인간에게 모든 것이 돌려지는, 인간 존엄성의 사회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과 국가에 대한 실천적 비판, 즉 혁명이 필요함을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기계적 존재인, 그래서 인간으로부터 인간적 감정을 느끼는 것 조차 용인 당하지 못하는 기증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기에 조금 불충분한 지점이 있다. <네버렛미고>가 그리는 복제인간의 사회로 갔을 때 계급차이의 발생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넘어선다. 물론 기증자들이 자신의 근원자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근원자들이 범죄자, 매춘부, 마약 중독자들일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여전히 자본이 기술을 소유하고 계급을 양산하는 관계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자본을 가진 ‘인간과 기계적 존재’로 확장된다. 인위적으로 생산된 복제인간인 그들은 인간적 존재인가 기계적 존재인가? 그들의 소외를 단지 소유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노동수단이 기계화됨으로 인해 발생한 주체로부터의 소외를 기계적 존재인 그들에게 곧바로 적용할 수 있을까?


시몽동(G. Simondon)은 이러한 마르크시즘과 인류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소외를 사유하는데 유용한 개념들을 제공한다. 시몽동은 현대 세계에서 소외의 가장 강력한 원인은 기계에 대한 몰이해에 비롯된다고 말한다. 기술적 개체를 인간의 적이자 경쟁자로 간주하는, 인간이 기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결국 인간적 존재와 기계적 존재를 대립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개념은 소외의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지만, 기술과 관련된 소외의 문제에 있어 노동 개념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기계적 존재를 생산물의 관점에서만 고찰했을 뿐, 대상이 되어버린 기술적 존재 안에 담긴 소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러한 인류중심주의는 기계를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을 타당하게 하고, 생산과 생산관계와 무관한 기술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소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불충분하다. 시몽동은 마르크스의 생산관계에서 더 나아가 기술 그 자체의 존재론적 발전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더 일반화된 소외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김재희, 398) 산업사회에서 기술이 노동으로부터 인간 소외를 야기한다고 했을 때 이것은 근본적으로 노동이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기술적 대상들과 인간 사이의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시몽동은 모두 소외가 없는 관계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문제 삼는 지점에서 차이가 있다. 시몽동은 그의 책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에서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기술적 생산물로서가 아니라 기술적 대상으로서 독자적인 실존을 갖게 된 기술적 존재자들이 함축하는 소외의 문제를 조명한다.(김재희, 400)

시몽동은 개체화론은 단지 기계를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실재인 기계들도 생명체와 같은 개체성을 지니며 개체화 과정을 겪는다고 가정한다. 그는 인간과 기계들의 관계를 지배-피지배 모델이 아닌 평등한 상호협력 모델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게 사유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데(김재희, 391), 이것이 바로 그가 개념화한 인간-기계 앙상블의 기본 전제이다. 시몽동의 인간-기계 앙상블은 인간적 실재와 기술적 실재 어느 한 군데로 치중하지 않은 새로운 실재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인간과 기계의 본질적 차이에 근거하여 공통의 문제 해결을 위해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한다. 기술적 진보가 단지 상업적 이윤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으로 창출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캐시는 말한다.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구하는 사람들의 것’과 많이 달랐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지점이 나타난다. 그들은 체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인간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캐시의 대사는 그들 또한 단지 도구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증거이다. 이 지점에서 바로 시몽동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적 존재와 기술적 존재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들의 소외는 단순히 인간 혹은 기계의 소외 어느 한 가지로는 해결될 수 없다. 시몽동이 말하는 해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확장에 의해서 진행하는 문화의 개혁(G. Simondon, 16)이 이루어질 때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인간이 갖는 기계의 지배에 의한 디스토피아적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재희 (2014). 포스트휴먼 사회를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청사진. 범한철학, 72, 387-414.

박홍원 (2014). 인간 소외와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이론, 10(4), 101-150.

양운덕 (1990). [특집 : 철학에 대한 논쟁들 3] 헤겔과 맑스의 노동개념. 현상과 인식, 13(4), 58-104.

Simondon, Gilbert. (1958) Du Mode d’existence des objects techniques, Paris: Aubier.: (2011).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김재희 옮김, 서울: 그린비.

Blank

이지애